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문단 편집) == 전후 인식 == || [[파일:페미나치.png|width=100%]] || [[파일:attachment/AGrammar_nazis_1.jpg|width=100%]] || 일단 세계 전체로 봤을 때 나치에 대한 인식이 좋은 나라는 당연히 '''극히''' 적다. 덕분에 이들은 웃자고 하는 게 아닌 이상 스와스티카나, 인터넷에서 흔히 나치에 대해 보이는 동경심 자체에 엄청난 거부감을 드러낸다. 나치의 군복이 멋지다거나 [[아돌프 히틀러]] 사진이 간지난다 같은 발언만 해도 사회적 생매장을 시키는 분위기니 주의하자.[* 네오 나치나 스킨헤드가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 [[종북주의자]], [[일베충]], [[메갈]] 등의 인식이 매우 좋지 않듯, 이들은 이미 주류 사회에서 병신 취급을 받고 있으므로 논외. 웃는 히틀러가 등장하는 광고 및 나치 코스프레 카페에 대해서 이스라엘 대사관과 주한 독일 대사관 측이 강력 항의한 적이 있었다.] 과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을 휩쓸던 독일에 대한 공포와 괴벨스의 선동술이 워낙 약발을 잘 받아서 나치의 독재 체제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빠른 재건과 도약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시각이 있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전체주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부정되는 추세다. 당장 전후 재건에 도움을 주었다는 경제 정책만 봐도 군수 산업 우선으로 체제가 바뀌면서 경제 혼란이 오기 시작했고 전쟁이 시작된 후에도 조직 간 손발이 안 맞아 전쟁 하는 국가가 맞나 싶을 정도의 비효율적인 운영으로 [[알베르트 슈페어]]를 비롯한 인재들이 이를 바로잡는데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게다가 나치당 내부의 부패는 매우 심각해 아첨꾼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괴링을 비롯한 고위직들에게 비리는 일상이나 다름없었고 당원들은 선동 활동이나 내부의 적 색출이라는 명목의 탄압 활동은 잘 했어도 막상 적들이 쳐들어오면 자기의 일신만 챙겨서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독일이 전쟁터가 되는 와중에도 국정 운영도 모르는 주제에 권력다툼에 눈이 멀어 있을 정도였다. 흔히 알려진 바로는 독일 1933년 나치당 집권 후 35년 3월 자를란트 귀속, 36년 3월 라인란트 진주, 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 38년 9월 나치의 체코 주데텐 점령, 39년 9월 1일 폴란드 선전포고에 이르는 과정을 히틀러 정부의 호전성과 전쟁광의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설명된다.(히틀러 정부가 대규모 전쟁을 벌일 의도가 별로 없었을 때도 있었다는 것은 히틀러 정부가 선택한 해군력 증강 추진 사업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38년도 말에 에리히 레더 제독은 히틀러에게 2개의 해군력 증강방안을 건의했다. 하나는 잠수함, 기뢰부설함 건조 사업이었고 하나는 10년 계획의 최신 수상함 건조 사업이었다. 히틀러는 10년 계획을 6년만에 달성하라는 조건으로 후자를 선택했다. 이것은 당장 전쟁할 계획은 없었다는 것이다. 태평양 지휘로 명성있는 미국 체스터 니미츠 제독도 ‘대해상전’에서 히틀러가 왜 후자를 택했는지 의문을 표명하면서 히틀러 정부의 해전 준비가 별로였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자를란트부터 주데텐까지 모두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해 빼앗긴 땅이었거나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으로 인해 타국 영토가 됐지만 절대 다수의 독일인이 살던 땅들이었다. 히틀러 정부가 들어선 뒤 독일 경제가 눈부시게 부활하자 재외 독일인들은 독일로 귀속되기를 열망했다. 오스트리아는 1차대전에서 패배한 국민투표로 나치독일과의 통일을 결정했지만 승전국들이 불허했다. 대공황 시기 경제난 속에서 집권한 오스트리아 기독교사회당 정부는 반나치 노선을 추구했지만 오스트리아 대중들 중에는 독일과 통일을 원하는 여론이 점점 강해졌다. 나치당 집권 이후 독일 실업률이 갑소하고 국경 너머 독일 경제가 번영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38년도에 국민여론의 압박으로 독일과의 통일여부를 묻는 투표를 시행하겠다고 했지만 갑자기 투표권을 24세로 올리는 등 부정투표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통일 찬성여론이 높았기 때문이다. 독일은 공정한 투표가 보장되도록 선거절차를 바로잡으라는 요구에 오스트리아가 응하지 않자 투표가 예정됐던 3월 13일 군대를 보냈다. 이듬해 봄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독일과의 통일은 압도적인 찬성을 받았다. 성인 3명 중 1명이 실업자였던 심각한 경제파탄의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통일한 후에 실업률이 1년 만에 1.2%로 감소했다. 1차대전 뒤 체코 땅이 된 주데텐의 다수 주민도 독일인이었다. 타국에서 소수민으로 차별과 폭력을 당하며 살다가 독일과 오스트리아 경제가 부활하자 주데텐의 독일인도 독일로의 귀속을 열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